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김만권 지음 | 혜다 | 2021년 01월 29일 출간
p.12 우리가 누군가를 만지지 않으려 한다는 건, 사회적 약자들에겐 존재로서 의미를 잃고 살아남기 위해 홀로 견뎌야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뜻이다. 한쪽의 누군가가 언택트의 장점을 이야기할 때, 언택트의 장점을 배달하는 누군가는 목숨을 잃기도 한다.
p.47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건 ‘시간’의 존재예요. 인간이 끊임없이 고뇌하며 이 세계를 향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가 ‘시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 즉 유한하며 사멸하는 존재라는 데 있어요.… 인간이 누군가의 탄생을 기뻐하는 이유 역시 인간이 궁극적으로 사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p.53 인류가 인간을 닮은 기계를 두려워하는 속 깊은 이유는 기계를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인간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간을 닮은 기계일까요, 아니면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지 못하는 인간일까요?
p.64 “기술의 발전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만들어 내고 있는 시대에, 왜 우리는 일자리라는 생존 수단을 고민해야만 할까?” 다시 말해 “인류가 탄생한 이래 가장 파이가 커진 시대에, 나눌 것이 가장 많은 시대에, 왜 우리는 내 몫의 파이를 어떻게 지켜내야 할지 걱정하는 것일까?” … “생산력 증대가 필요했던 결핍의 시대의 분배방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p.77 4차 산업혁명에 들어서며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제1 기계 시대가 만들어 놓은 세 가지 해법 모두가 그 유효성을 잃고 있는 현실이에요. 제1 기계 시대의 해법이 만들어 놓은 보호망은 소수의 노동자들만이, 소수의 인간만이 특권의 형식으로 누리고 있을 뿐이죠. 제2 기계 시대의 인간들은 ‘각자를 위한 노동’으로 내몰리며 ‘서로를 위한 보호’라는 체계를 상실하고 있어요.
p.93 세계 시장의 행위자가 민족국가라는 단위라면, 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지구적 시장은 새로운 두 행위자, 강력한 국제기구와 초국적 기업을 낳았어요. …국가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경제적 행위자로 등장했죠.
p.98 그 결과는…복지국가의 쇠퇴로 나타났어요. 서구 사회와 우리나라의 다른 점은, 우리의 경우엔 복지국가의 경험 없이 바로 민영화와 민간 위탁의 시대로 넘어갔다는 거죠. …‘어떻게 복지국가의 쇠퇴를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들이 순식간에 커다란 저항 없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가?’
p.101 복지국가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이 입었던 복지의 혜택이 오늘날의 자신들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망각하기 시작했던 거예요.
p.109 ‘자기 인생은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다.’는 윤리에 담긴 핵심적 발상을 한마디로 정리해 볼까요? ‘삶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국가에 요구하기보다는 스스로 그 위기를 넘어서야 한다.’ 결국 국가가 보호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거죠.
p.122~123 플랫폼에서 일하는 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노동자’라는 지위를 ‘사업자’라는 말 뒤에 교묘히 숨겨서, 이들이 노동조합 등을 만들어 행사할 수 있는 ‘노동3권’까지 박탈해버려요.…이처럼 공유 경제가 채택한 용어들은 종사자들이 노동자로서 연대의 감성과 행동을 공유할 수 없도록 사전에 차단해버리죠. 공유 경제의 플랫폼에서 실제로 공유되고 있는 건 ‘건당’, ‘분당’, ‘시간당’처럼 짧은 시간만 사용할 노동력이 필요한 이들과 ‘별점의 감시 아래 경쟁하며 상시 대기하고 있는 노동력’이라는, 수요와 공급의 만남뿐이에요.
p.124 요약하자면, 세계 시장에서 글로벌 시장으로의 거대한 전환, 복지가 길러낸 자신감 넘치는 세대들이 역설적으로 복지국가 대신 시장 체제를 선택한 것, 내 삶은 내가 책임진다는 자기 책임 윤리의 확산, 스마트폰 인류의 등장과 함께 성장한 플랫폼 자본주의 그리고 플랫폼 자본으로의 변신이 양산해 낸 불안정한 비임금 노동자 등 연쇄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요인들이 제1 기계 시대가 만들어낸 ‘서로를 위한 보호 체계’를 무너뜨린 원인이 되었던 거예요.
p.127 제2 기계 시대가 만들어 낸 21세기형 자본주의…극소수의 승자와 엘리트만을 위해 작동한다…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서 균형과 경제 역할을 해야 할 민주주의마저 소수의 승자들을 위한 정치체제로 타락해 버렸다
p.131 이런 극단적 양극화에 가장 많이 영향을 끼친 것 중 하나가 바로 디지털 기술의 폭발적인 성장이었어요.
p.148 공공 부문의 자신이 민간 부문으로 이전될 때, 정부가 가난해진다는 것 외에 또 다른 문제가 있어요. 바로 정부의 대응 능력 상실이에요.
p.153 ‘민간에는 슈퍼리치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정부는 점점 더 가난해지고,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은 한 사회가 이룩한 풍요로움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있다.’
p.159 소수의 정치 엘리트와 엄청나게 부유한 이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 그런데 포스트민주주의 사회의 더 중요한 특징은, 정치 결정권자들이 부유한 이들의 이익을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실현시켜준다는데 있어요. 공공부문의 민영화가 대표적인 사례죠.
p.161 전통적으로 포퓰리즘이 작동하는 기본원리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평범한 사람들의 권력을 빼앗아 갔다. 그 권력을 다시 찾아 돌려주겠다.’는 거예요. 이 시대의 좌파 포퓰리즘은 이 원칙에 따라 충실히 움직여왔어요. 이들은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연대해야 하는 존재로 여기죠. 반면 우파 포퓰리즘은 ‘소수의 엘리트’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제 3의 집단을 설정해요. 여기엔 이민자, 외국인 노동자, 난민, 여성 등이 포함되죠. 우파 포퓰리즘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자국 내 다수인 ‘우리, 평범한 사람들’ 대신 이 ‘제3의 집단’에 관심을 더 많이 쏟는다고 주장해요. 이들이 ‘평범한 우리’보다 더 많은 권리를 누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여론을 조장해 지지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거예요.
p.183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자본과 영토 안에 갇혀 있는 노동의 현저한 대비…자본이 영토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면, 영토에 갇혀 있는 노동에 대해서도 애착을 가질 이유가 없다…자본이 애착을 가지지 않는 노동에 국가가 애착을 가질 이유가 있을까요? 국가가 돌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른 동료 시민들이 애착을 가질 이유가 있을까요?
p.189 산업사회는 …생산을 하는 사람 즉, 노동자들도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1960년대부터 서구 사회는 본격적으로 소비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해요. 1980년대부턴 ‘소비의 미학’으로 지어진 지구적 시장의 형성과 함께 생산자들이 점점 더 힘을 잃으면서 소비자들이 중심에 서게 되죠. …‘소비자가 왕이다.’ 이런 사회에선 누구를 보호해야 할까요? 당연히 소비력이 있는 사람들이겠죠.
p.192~193 어떤 정책이든 반응성에서 일관적이었던 변수는 딱 하나, 그 집단의 ‘소득수준’… ‘소득이 높은 이들에겐 반응하고, 소득이 낮은 이들에겐 반응하지 않는다.’
p.201 중개 행위만 하며 작게는 10%, 많게는 30%에 이르는 과다한 수수료를 떼 가는 공유 경제 플랫폼, 이게 정말 공유 경제일까요?
p.206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이전에는 ‘10분 동안 자리에 앉아서 당신을 위해 일하도록 하고 10분이 지나면 바로 해고할 수 있는 사람’ 구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함께 당신은 이제 그런 사람들을 실제로 구할 수 있고, 약간의 푼돈을 주고 일을 시키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바로 그들을 해고할 수 있습니다.”
p.210 제도에서 배제된 이들은 국가의 보호망 외부에 놓이게 되겠죠.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이 국가의 시민으로서 살아가야만 해요.…배제되어 외부에 포함된 자들을 헐벗은 인간, 호모 사케르로 전락한다
p.213 ‘소비사회에서 생산자들의 윤리인 노동 윤리가 필요한 이유는 가난한 자들을 사회에서 배제시키기 위해서다.’…빈자들을 침묵시키고 최종적으로는 사회의 도움에서 배제시키기 위해서…노동윤리란 가난을 ‘타락의 언어’로 그려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것이죠.
p.220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 다섯 가지 단계를 거치려 해요. 첫째, 제2 기계 시대에 맞는 분배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노동 밖으로 나가자는 제안. 둘째, 제2 기계 시대에 상응하는 새로운 권리로서 디지털 시민권을 만들자는 제안. 셋째, 분배의 재원으로 로봇세와 구글세를 걷자는 제안. 넷째, 그 재원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분배 형태(기본소득, 기초자본 등)를 통해 시민들에게 현금을 나눠주자는 제안. 다섯째, 노동자들을 위한 보호망으로서 ‘전 국민 고용보험’을 도입하자는 제안.
p.221 맨날 먹고 살려고 열심히 일하는 것 말고, 우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세계를 짓는 것, 그게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가장 가치 있는 활동이야.
p.226 갤브레이스가 걱정하는 건 더 이상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였죠. …우리나라 역시 세계 11위의 경제력을 지닌 국가가 되었어요. 적어도 우리가 열매를 나누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죠.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노동으로 자격을 증명하지 않는 자, 빵 한 조각도 가져갈 수 없다.’는 노동윤리를 꼭 쥐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p.241 초국적 플랫폼에게서 우리가 일한 몫을 받아내자 : 구글세
p.242 구글이 세금을 회피하는 방식은 너무나 창조적이고 복잡해서 알고 나면 깜짝 놀라요.…대부분의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도 구글을 똑같이 따라 하며 세금을 회피하고 있죠.
p.246 기본소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건 소비력 향상이 아니란 점이에요. 이 제도의 진정한 목적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과 함께 지속적인 소비력이 가져오는 몇몇 효과에 있죠.
p.247 사회적 약자들에게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여력이 지속적으로 주어진다면 그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을 때 ‘그만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겠죠. 정리하면, ‘지속적인 소비력’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방어막 역할을 해준다는 거예요.
p.248 “하느님은 이 세계를 인간에게 공유물로 주셨다. 그런데 우리가 이 지상의 것을 모두 사유화해 버려서 우리 후대에게 물려줄 것이 남아있지 않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p.249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노동이 아니라 자본이 더 많은 소득을 만들어 내고 있고, 이런 자본이 지닌 ‘세습되는 경향’이 당대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진단해요. …2015년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수저론’은 피케티의 이론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죠.
p.266 ‘능력주의란 평등을 받아들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노골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불평등이란 모순을 비켜가기 위해 작동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능력주의가 새로운 계층을 만들어내고, 새롭게 등장한 계층 사이에 높은 벽을 만들어 결국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다.
p.247 대니얼 마코비츠 역시 『능력주의의 함정(The Meritocracy Trap)』(2019)에서, 당대의 불평등은 능력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면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해요. 그 또한 능력주의가 불평등의 해결책이 아니라 원인이라는 마이클 영의 주장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마코비츠는 1950~60년대 서구 사회에서 능력주의 혁명이 일어난 시기에 주목하며, 이때 일어난 가장 큰 변화 하나를 지적해요. 바로 엘리트 계급이 자식에게 신분과 재산 대신 ‘능력을 만들어서’ 물려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죠.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건 능력을 ‘만들어서’ 물려준다는 거예요.
p.269~270 능력주의가 퍼져나갈 때 민주주의 사회는 두 가지 문제를 마주하게 돼요. 첫째, 중산층이 무너진다. 둘째, 혐오와 차별이 퍼지며 구성원들 간의 연대가 가로막힌다.
p.271 결국 능력주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연대 대신 능력 없는 자는 차별받아도 괜찮다는 비뚤어진 의식을 키우고, 평범한 다수를 배제해 버림으로써 그들이 수치심과 혐오를 느끼게 만들고 있는 거죠.
p.272 이 순간에도 기업은 위기를 핑계 삼아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며 규제 완화를 주장하고, 사회적 안전망 없이 노동 현장에 내몰린 이들은 더욱더 소외되겠죠.
p.274 ‘위기에 뒤로 남겨지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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