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발렌틴(페트루스 수사) 게르네르트는 1882년 2월 14일 뷔르츠부르그 교구의 클라인벵크하임에서 아버지 요셉 게르네르트와 어머니 마르가리타 쉬미트 슬하에서 태어났다. 요셉 발렌틴 1908년 성 루드비히 원장좌 수도원에 입회하였는데, 이는 1914년에 재건된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의 전신이다. 페트루스(Petrus)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한 요셉 발렌틴은 1909년 7월 11일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가 참석한 가운데 첫서원을 했다.
페트루스 수사는 수도원 농장의 책임을 맡았다. 이어 수도원이 서울에서 원산 근교의 덕원으로 이전하기로 결정된 후, 그는 새 수도원 건축공사의 책임을 맡았고, 1931년에는 수도원의 대성당 건축공사도 맡았다.
북한에 공산당이 집권한 다음 1949년 5월 11일과 12일 사이의 밤에 페트루스 수 사는 다른 독일인 남녀 수도자들과 함께 처음에는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이후에는 40여명의 선교사그룹과 함께 옥사덕 강제 수용소로 옮겨졌다. 여기에서 페트루스 수사는 수용소 안에서 저질러진 학대에 쓰러진 첫 번째 희생자로 1949년 7월 3일 6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강제 수용소의 수녀 의사 디오메데스 메퍼트의 증언
페트루스 게르네르트 수사를 나는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수사들이 나에게, 그는 이미 감옥에서 설사를 심하게 했고 구석에 조용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기어 계속해서 기도를 했었다고 그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수사들이 그를 간간이 업고 가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수용소로 올라가는 어려운 길이 그를 매우 쇠약하게 했다. 그는 대부분 조용히 기도하면서 수용소 안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7월 2일 밤, 그는 바로 옆에 누워있던 사람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사망했다. 그는 수용소 위에 있는 돌투성이의 산허리에 묻힌 최초의 사람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그 앞에 섰을 때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옆에 눕게 될 것인지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