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비히(그레고르 수사) 기게리히는 1913년 4월 26일 프랑켄의 그로스발슈타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로스발쉬타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뮌스터슈바르작의 학생이 되어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전기 설비 기술을 배웠다. 1932년 루드비히는 그레고르(그레고리우스 Gregorius)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고 1932년 10월 20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첫 서원을, 1936년 1월 19일에는 종신서원을 하고 1939년 1월 6일에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1946년 무렵에 선교사들은 삼엄한 통제와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에서 덕원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9년 5월 초 수도원은 공산당 정치보위부원들 점거되었고 그레고르 수사를 포함한 신부, 수사들은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되었다. 그레고르 수사는 허락 없이 사진기를 소유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다른 수감자들이 옥사덕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 후 그레고르 수사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평양에 남았다. 그곳에서 그레고르 수사는 위대한 희생정신으로 보니파시우스 주교 아빠스를 돌보았다. 1950년 유엔군의 진격으로 북한군이 후퇴하기 시작했을 때, 평양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던 사람들은 북한 공산당원들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 운명은 그레고르 수사도 비켜가지 않았고 결국 10월 3일과 4일 밤에 살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