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바실리우스 수사) 하우저는 1886년 11월 10일, 현재 플로싱 본당인 폴링 지역바일러 발트에서 태어났다. 마틴 하우저는 1910년 24세 때 수도원에 입회하고자 하는 청원서를 보냈고 1911년 10월 5일 바실리우스(Basilius)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하였다. 바실리우스 수사는 1913년 10월 12일 첫서원을 하고 1914년 5월 3일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서울 수도원과 덕원 수도원에서 주방장으로 봉사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덕원 수도원을 공격하기로 계획하였고 이 계획은 1949년 5월 9일에서 10일 사이의 밤에 현실이 되었다. 정치보위부원들은 덕원 수도원을 점거하고 장상들을 연행하였다. 바실리우스 수사는 남은 독일인 형제들과 함께 1949년 5월 11일과 12일 사이의 밤에 트럭에 실려 평양 감옥으로 옮겨졌다. 그 후 1949년 6월 옥사덕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1950년 2월 14일 수용소의 혹독한 환경 때문에 숨을 거두었다.
강제 수용소의 수녀 의사 디오메데스 메퍼트의 증언
바실리우스 하우저 수사는 처음에, 수녀들이 부엌일을 맡기 전까지는 한 명의 형제와 함께 요리사 일을 했었다. 감옥에서의 시간이 그에게도 흔적 없이 지나가지는 않았다. 나쁜 음식이 그를 허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옥사덕에서 여전히 명랑하고 즐겁게, 새로이 건축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돌을 날라 목수들에게 가져다주었으며, 겉칠에 쓰이는 진흙을 발로 밟으면서 물과 섞었다. 모든 사람들처럼 그도 힘닿는 대로 공동체의 일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열성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다리가 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지치고 무감각해졌다. 성탄절부터는 매우 조심을 했는데도 수종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복수가 차기 시작했다. 그는 협착감과 갈증으로 굉장한 고통을 당했다. 그는 종종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병든 닭이라도 잡을 수 없을까? 닭고기 수프를 먹고 싶어.” 그러나 병든 닭을 잡는 목적을 성취하지도 못하고 죽어야 했다. 닭은 잡아서는 안 되었다. 우리의 가련한 환자들은 이렇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 우리는 이뇨제도 침술 기구도 없었다. – 우리의 훌륭한 수사 바실리우스는 1950년 2월 14일 영원한 고향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