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루페르트 신부) 클링사이스는 1890년 1월 5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1910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김나지움을 졸업한 요셉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성직지망 수련기를 시작했고 루페르트(루페르투스 Rupertus)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루페르트 수사는 1911년 10월 8일 첫 서원을 하였고, 로마의 성 안셀모 대학에서 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돌아와 뮌헨과 에탈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5년 동안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부원장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1930년 덕원 신학교의 철학대학 학장으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그는 1945년까지 신학교에서 가르쳤으나, 그 해에 소련군이 수도원을 점령하고 공동체에 점차로 극심한 제약을 가하였다.
“(사건은) 1949년 5월 9일 밤 11시에 발생하였다. 숲속에 있던 정치보위부원들이 수도원에 난입하였고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루치우스 로트 원장신부, 아르눌프 슐라이허 부원장 신부, 루페르트 클링사이스 철학교수를 트럭에 태워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끌고 갔다.”(김 베다 신부 증언)
‘어디인지 모를 곳’이란 원산이었는데, 그 다음 5월 11일에는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평양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북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루페르트 신부는 영혼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자신의 반공산주의 저술을 출판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거의 11개월간의 힘든 수감생활을 겪은 다음 그는 1950년 4월 6일 평양 감옥에서 가혹한 학대와 영양실조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