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겸손.성실한 수도자요 수도원 초기 역사 촬영한 기록자
출생 : 1887년 10월 25일 독일 아이히슈테트 교구 라우터호펜
세례명 : 요한 세례자
첫서원: 1909년 10월 10일
한국파견: 1914년 5월 3일
소임: 건축 및 사진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2년 4월 6일 옥사덕수용소
세례자 요한(미래의 고트리프 수사) 아우어는 1887년 10월 25일, 노이마크트(아이쉬테트 교구) 근처의 라우터호펜에서 작은 농사일을 하는 부친 미하엘 아우어와 모친 카타리나 아우어 슬하에 태어났다. 요한 아우어는 목공 전문가로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07년 10월 4일 고트리프(고델리부스 Godelibus)라는 수도명으로 수련기를 시작하였다. 1909년 10월 10일에는 첫서원을, 1913년에는 종신서원을 발하였다.
1914년 5월 3일 그는 서울로 파견되었고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중국 칭타오로 징집되었는데 거기서 일본인의 포로가 되었다가 1920년 석방되었다. 그는 포로 기간을 자신의 지식을 보완하는데 이용했으며 동료 포로였던 기술자로부터 건축설계를 배웠다. 1949년에 고트리프 아우어 수사는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되었으며 그 뒤에 옥사덕 강제수용소에 다시 수감되고 학대로 선종하였다.
※강제 수용소의 수녀 의사 디오메데스 메퍼트의 증언
고트리프 아우어 수사는 덕원에서부터 이미 병약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잘 버텼다. 나는 의사의 직무 외에 자유시간이 있으면 그가 톱질하는 것을 여러 번 도와주었다. 나에게 톱질하고 장작을 쪼개는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그였다. 1952년 4월 4일, 얼음이 녹고 눈이 올 듯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도 나무를 베러 산으로 가야 했다. 굉장한 폭풍이 일었고, 눈 녹은 물이 연신 짚신으로 들어와 그는 추위에 떨면서 축축하고 찬 발로 일을 했다. 동료들의 충고로 그는 일찍 작업장을 떠나고자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다음날 그는 열과 심한 옆구리의 통증으로 앓아누워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약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어 폐렴은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4월 5일부터는 심장의 힘이 현저하게 떨어져 주사에도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4월 6일, 착한 고트리프 수사는 평화롭고 고요하게 잠들었다. 그의 조용하고 우아하며 겸손하고 욕심없는 태도는 나에게 항상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그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질서의 모범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하느님이 그에게서 모든 것이 질서가 잡혀있는 것을 보시게 될 것이며, 당신의 충실한 종에게 영원히 보답하시리라는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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