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그레고르 신부) 쉬테거는 1900년 12월 30일 레겐스부르그 교구의 작은 마을 트뢰베스(모오스바흐 본당구역)에서 아버지 요한과 어머니 안나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양친은 모두 교사였다.
슈바이클베르그 수도원에 입회한 쉬테거는 그레고르(그레고리우스 Gregorius)라는 수도명을 받고 1922년 7월 11일 첫서원, 1925년 7월 12일 종신서원, 그리고 1926년 7월 11일 서품을 받았다. 그레고르 쉬테거는 슈바이클베르그 수도원의 부설학교에서 가르쳤으며, 1930년 4월 21일 한국으로 파견되어 영흥본당 보좌신부로, 그 다음에는 영흥 본당 주임 겸 선교기지 책임자로 일하였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노력과 교리교육에 대한 특별한 재능으로, 활기찬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발전하는 데 일조하였다.
1949년 4월에 이 열정적인 선교사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그레고르 쉬테거 신부는 강론과 교리교육을 통해 공산주의 이념을 반대한다는 죄목을 받고 체포되었다. 그는 처음에 원산에 수감되었다가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북한 법정은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그에게 7년형을 선고하였다. 이 “사건”이란 그가 종교를 가르치면서 유물론을 반박한 것을 가리킨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진격해 오자 북한군을 철수를 시작했고 평양 감옥들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이때 그레고르 쉬테거 신부도 살해되었는데 때는 1950년 10월 3일과 4일 사이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