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아가타(악네타 헌신자)는 1910년 황해도에서 출생하여 서울 혜화동에서 성장하였다. 크리소스토마 쉬미트 수녀의 증언에 의하면 장 야고보와 그의 딸 아가타는 서울의 독일 포교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잘 알고 있었다. 원산 수녀원이 막 정착했을 때 장 야고보는 아내 그리고 아가타와 함께 수녀원 근처로 이사하였다.
장 아가타는 1927년 4월 1일 원산 수녀원에 입회한 4명의 지원자 중 하나였다. 1년 후인 첫 번째 청원자 그룹은 검은 베일을 받았지만, 그녀는 그중에 들지 못하였다. 아가타는 부모들이 정해 준 남자와 혼인을 하였는데, 신랑은 이미 심한 결핵을 앓고 있었고,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그와 사별한 경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젊은이는 원산 수녀원 백 베네딕타 수녀의 동생이었다.
아가타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해마지 않았던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이 되지 못한 것에 크게 실망하였고 이는 그녀의 일생동안 슬픔으로 남았다. 원장 수녀의 조언에 따라 그녀는 헌신자로 남을 것을 결심하였다.
아가타가 가장 오랫동안 맡은 소임지는 원산 수녀원의 수부였다. 그녀는 또한 원산의 그리스도 왕 본당에서 선교사업도 하였다. 어떤 업무가 주어지더라도 그녀는 그것을 성실하고 헌신적으로 수행하였다. 아가타의 마음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가난한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원장 수녀에게 알렸고, 그들을 위해 음식과 물건을 구비해 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검소하였다.
1949년 수녀원이 공산당에 의해 해산된 후 아가타는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친척이 없었으므로, 함흥의 교우 집에 머물며 벽돌공장에서 일하여 생계를 꾸려갔다. 그녀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날 체포되었다.
그 날 이후 아가타의 행방은 더 이상 알 수 없다.
1950년 10월 7일 국군이 미군과 함께 함흥을 점령하였다. 그 며칠 전 공산군은 도시에서 철수하였다. 국군이 그 감옥을 점거했을 때 공산군들이 은폐하려던 많은 시체들을 찾아내었다. 그들 가운데 신자들 몇이 장 아가타 헌신자의 시신을 발견하였는데, 그녀의 이마와 뺨에는 상처가 있었고 뒷머리에는 도끼로 맞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함흥의 신자들은 장 아가타 헌신자의 시신을 옛 수녀원 자리의 병원에 안치하였다가 성당 뒤 언덕 위에 안장하였다. 그들은 그녀 옆의 땅에 병을 뒤집어 묻었는데, 그 병 안에는 ‘장 악네타’라는 이름이 적힌 종이쪽지가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