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프리드리히(다고베르트 신부) 엔크는 1907년 9월 15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오토는 이스마닝에서 몇 년을 보내고 1914년 할아버지 댁이 있는 프라이부르그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김나지움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엔크의 종교교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프라이부르그 학생연합 출신으로 뮌헨에 와서도 여러 종교 활동과 ‘신독일 운동’의 다른 활동들에 참여하였다. 신심 있는 가문 출신으로 종교와 연관된 모든 것에 커다란 관심과 열성을 보였다. 몇 년 전부터 사제성소, 수도원, 선교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사고방식, 모범적 생활태도, 순명정신과 자제력, 겸손과 이타심, 타인을 위한 성소의 이상적 지향, 항구함, 그리고 건강한 신체조건을 감안할 때, 그가 선교 사제나 수도 사제가 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1927년 오토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 요청서를 제출하였고 다고베르트(다고베르투스 Dagobertus)라는 수도명으로 수련기를 시작하였다. 1928년 5월 14일 첫 서원을 발하였고 1933년 3월 26일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934년 4월 2일 북한에 있는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덕원에서 그는 믿을 만한 행정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수도원과 이에 속한 분원들의 당가로 임명되었다.
다고베르트 엔크 신부의 체포경위는 다음과 같다. 1948년 12월 1일 재정 책임을 맡고 있던 다고베르트 엔크 신부는 밀주 제조라는 조작된 죄명을 뒤집어쓰고 원산 인민교화소에 수감되었다(공산당에 속했던 농업조합에서 술을 빚도록 수도원을 설득했는데, 이것은 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결국 이는 불법 행위를 조작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1949년 5월 11일 다고베르트 엔크 신부는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원산에서 평양 인민교화소로 이송되었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진격해오자 북한군은 후퇴를 시작했고 이때 평양 감옥에 수감되어있던 사람들은 공산당원들에게 피살되었다. 그들 가운데 다고베르트 엔크 신부도 있었는데, 그는 1950년 10월 4일과 5일 사이의 밤에 피살되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죽음으로 증거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