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1,1-45 사순 제5주일
바리사이들과 유다인들은 지금, 속수무책으로 퍼져나가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는 기분 아닐까? 8장에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간음한 여인을 기지 어린 한 마디로 살려낸 그자는 이미 위험 인물이다. 그자는 9장에서 눈 먼 이의 눈을 뜨게 하더니 이번에는 죽은 사람이 무덤 속에서 걸어 나오게 만들었다. 그자에 대해 무슨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복음 이야기는 이런 맥락 속에 위치한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표징은 점점 강도를 높여 왔다. 예수님은 복음 초반부터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요한 1,4)는 둥,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는가 하면(요한 6장),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며 생명 타령을 열심히 하셨다.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 들었는지나 모르겠지만, 일단 많은 사람이 열광하며 그분을 믿었다. 바리사이들과 어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선언에 심기가 불편했고 이해도 못했으며 불경스럽다고 여겼다. 이제 당신을 생명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발언이 눈앞에서 진짜 벌어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라자로가 걸어나오기에 앞서 마르타의 고백과 예수님의 기도가 나온다.
예수님이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고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며 이것을 믿냐고 물으시자, 마르타는 곧장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정체를 고백하며 핵심으로 들어간다. “당신은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말이다.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 이것이 예수님이 복음 내내 하셨던 당신에 대한 모든 말씀의 최후의 요약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인 것도 결국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이 하느님의 아드님은 라자로를 부르시기 전에 아버지께 미리 감사를 드린다. 당신 말을 이미 들어주셨다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창조주인 분을 아버지로 둔 그분은, 1초 후를 모르는 인간과 달리 모든 것을 들어주시는 아버지께 감사드릴 수 있다. 그렇지만 직선적인 시간 속에 사는 마르타와 군중들과 우리들이 당신을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 이제 라자로를 불러내신다.
우리에게 라자로의 부활은 죽음을 거친 후 맞이하는 사건이지만, 아버지와 예수님께는 사건의 전후가 없는 것이다. 마치 3차원의 세계에서 넘을 수 없는 시간 법칙이 4차원에서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무엇을 청해서 받거나 거절 당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다. 왜냐면 “사람이 되신 말씀”은 하느님이시니까.
이 라자로의 부활 장면 안에 요한 복음이 다 몰려 들어와 있다. 이야기 전개상으로도 이 부분은 골든 크로스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잘렸지만, 이 라자로 부활이 일으킨 스캔들 때문에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 곧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제 당신 생명을 내놓으시는 것이다.
사순 시기의 여정이 급경사를 이루며 깊어간다. 예수님은 끝없는 암흑 속을, 그 종말을 아시면서도 똑바로 걸어 내려가신다. 그 끝에는 하느님이 하실 일만 남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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