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이땅에 발 디딘 첫 번째 수도자
북녘 복음화 초석 쌓아
(아파아리아 명의 주교, 덕원자치수도원구장 겸 함흥대목구장)
출생 : 1877년 1월 10일 독일 풀다교구 오버루프하우젠
첫서원 : 1900년 2월
사제수품: 1903년 7월 26일
한국파견: 1909년 1월 11일
아빠스 축복: 1913년 6월 8일
원산 대목구장 임명: 1920년 8월 25일
주교 수품: 1921년 5월1일
덕원 자치수도원구장 겸 함흥 대목구장: 1940년 1월 12일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9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2월 7일 평양 인민교화소
요셉(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세례명) 사우어는 1877년 독일 헤센의 오버루프하우젠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에서 중학과정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심각한 질병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가정을 도와야 했다. 그는 1900년 가을, 수도원에 입회한 후에 뮌스터에서 고등학교 졸업자격시험(Maturaprüfung)을 통과하였다.
1898년 사우어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보니파시오(Bonifatius)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하였다. 1900년 2월 4일 첫서원을 발하였고 1903년 3월 21일 종신서원을 발하였다. 수도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철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그는 즉시 딜링엔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고 신학원(Studienheim) 운영을 위탁받았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프랑스인 뮈텔 주교에게 서울에 선교 베네딕도회원들을 파견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보니파시오 사우어 신부와 도미니코 엔쇼프 신부를 서울에 보내서 설립 가능성을 조사하도록 임명하였다. 1909년 두 신부는 한국에서 서로 만나 그 목적에 적합한 부동산을 구입하였다. 그 다음에 도미니코 신부는 독일로 돌아갔고 보니파시오 신부는 수도원 설립에 전념하였다.
1909년 12월 6일 서울 백동에 새로 설립된 베네딕도회 수도원은 보니파시오 신부를 원장으로 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초기부터 그는 학교사도직과 공방 건설에 중점을 두었다. 1913년 원장좌 수도원이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을 때, 당시 총회 때문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었던 보니파시오 신부는 1913년 6월 8일 아빠스로 축성되었고, 같은 해 11월 한국으로 다시 귀국하였다.
1920년 8월 5일 포교성성은 서울의 베네딕도회원들에게 갓 설정된 원산 대목구를 위탁했다. 보니파시오 아빠스는 원산 대목구의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 뮈텔 주교에 의해 주교로 서품되었다.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선교직무를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위하여 1927년 선교 지역과 떨어져 있던 서울 수도원을 원산 근교의 덕원으로 옮겼다.
1949년 5월 9일과 10일 사이의 밤에 북한 공산당 정치보위부원들이 수도원에 난입해 모든 독일인 수도자들과 한국인 사제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원산 교도소에, 나중에는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됐다. 허울뿐인 재판을 통해 수도자들은 ‘반공산당을 위한 태업’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심한 천식을 앓고 있었는데, 독방에 감금돼 반년 이상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것이 그를 단기간에 죽음으로 몰고 갔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난방도 안 되는 2㎡ 남짓한 독방에 수감됐다. 설비라고는 변기통 하나뿐이었다. 수도복과 주교 십자가는 압수되고 대신 푸른 죄수복을 입었다. 11월 날이 추워져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천식이 심해지자 교화소 측은 그레고르 기게리히 수사를 함께 가뒀다. 기게리히 수사는 침대도 이불도 없이 맨바닥에 누워 허물어져 가는 아빠스를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누워만 있어서 생긴 욕창이 몹시 쑤십니다.” “나를 집으로 보내 주시오!”라고 힘없이 말하다가 혼절하곤 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는 사흘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1950년 2월 7일 아침 6시 선종했다. 옆 감방에 갇힌 동료 수도자들은 그의 선종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몇 주 후 임근삼(콘라도) 수사와 김안나(데레사) 수녀, 장 안토니오 수사가 평양 근교 용산리 공동묘지 내 ‘계몽 교육 특별 연구소’로 지정된 곳에 묻혀 있는 그의 시신을 찾아냈다. 그의 빨간 주교 양말을 보고.
“낮에는 형무관이나 보위부원들이 병사했거나 총살당한 죄수들을 묻기 위해 자주 드나들었으므로 들킬 위험이 있었다. 우리는 야음을 이용했다. 교화소 의사들인 노재경 선생과 이 선생의 증언으로 장소를 대충 알고 있었으나, 새로 쓴 무덤이 많고 무덤에 아무 표시도 없어서 찾기가 어려웠다. 깊은 밤중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 사이로 스쳐 가는 초봄 바람에 몸은 한없이 떨리고, 삽질 소리에도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삽질에 숨이 찼고 가슴이 뛰며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세 번째 무덤을 팠을 때,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께서 잡혀 갈 때 신었던 붉은 양말을 보았다.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수염과 인자한 모습이 영락없는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였다”(임근삼 수사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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