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스는 1909년 10월 10일 첫서원을 하고, 4주 후에 서울 백동 성 베네딕도 수도원을 설립하는 데 협력할 다른 형제들과 함께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1911년 백동수도원에 기술학교가 설립되었고 일데폰스 수사는 기술 선생이 되었다.
일데폰스 수사는 선교 지역의 여러 본당들과 학교들을 건축하였다. 1938년에는 의란 지역에서도 카푸친회원들을 위해 주택들과 성당들을 세웠다. 감사의 표시로써 그에게 “명예 카푸친회원” 자격이 주어졌고, 카푸친회의 특권과 호의를 받을 수 있었다.
1949년 5월 일데폰스 수사는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되었고 나중에 옥사덕 강제 수용소에 이르러, 그곳에서 1952년 3월 20일 추위와 영양실조로 순교하였다.
강제 수용소의 수녀 의사 디오메데스 메퍼트 의 증언
일데폰스 플뢰칭어 수사는 유능한 수용소 대장장이었다.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구금생활을 비교적 잘 견뎌냈으며, 내가 수용소에 왔을 때에는 활발하고 일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는 발명에 재능이 많았고, 각각의 곤란한 상황에 대응해 쓸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줄 알았다. 기구의 잦은 수선, 예를 들어 괭이와 낫을 새로 불리기 위해서 그는 정교하게 고안된 풀무가 달린, 이동이 가능한 화덕을 제작했다. 처음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의 어려운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차로 그것은 불가능하고, 그를 좀 더 느슨하게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한 번 담을 쌓을 때 소장이 그에게 지나치게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라고 명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아주 침착하게 그에게 말했다. “나는 할 수가 없소. 당신이 하시오!” 1949년 가을, 처음으로 푸른 솜옷을 입게 되었을 때 그는 말했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나를 푸른 옷을 입은 채로 매장하시오. 나는 주님 앞에 가서 말할 것이오. ‘당신이 일데폰스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당신의 이 늙은 일데폰스를 보시오!’” 그 늙은 수사는 중국 땅에서 경미한 뇌일혈로 병자 도유성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만포 시기의 고난을 잘 견디어냈다. 그러나 청천 수용소로 돌아와서 사람들은 그의 기운이 쇠약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몇 달 동안 그는 여기저기서 일을 하고, 낫을 갈았으며, 다른 봉사활동도 했다. 그러나 점점 사람들은 그를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병실의 자기 자리에 누워서 묵주기도를 드렸다. 정신력도 쇠퇴하는 것 같았다. 밤에는 종종 헛소리를 해서 동료들을 깨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안셀모 신부보다 먼저 사망할 것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겨울을 견디어냈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점점 더 쇠약해지다가 1952년 3월 20일 평화롭고 고요하게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