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노(요셉 수사) 그라하머는 1888년 6월 1일 뮌헨-프라이징 대교구 에르드백 지역의 아이젠호펜에서 태어났다. 소규모 농업에 종사했던 그의 아버지 시몬 그라하머는 크레스첸츠 본과 결혼했는데, 35세의 일기로 벤노가 태어난 지 넉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여섯 자녀의 양육은 전부 어머니가 맡았는데, 하느님께 대한 어머니의 굳은 신앙과 신뢰는 가족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자녀들의 모범이 되었다. 자녀들 중 넷이 수도생활을 선택했다. 두 아들은 딜링엔의 프란치스코회, 그리고 다른 두 아들은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908년 1월 13일 그라하머는 요셉(요세푸스 Josephus)이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하였다. 1910년 1월 16일 첫서원을 하였고, 1911년 1월 7일 한국으로 파견되어 서울 백동 수도원에서 1913년 3월 23일 종신서원을 했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 실용적인 성향, 단순함은 그의 장점이었다. 요셉 수사는 재단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수도복과 전례복장의 책임을 맡았을 뿐 아니라 수도원의 작업장과 문간 책임도 맡았다.
요셉 수사는 이어서 병실 간호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 소임은 수도원에 큰 도움을 주었다. 지역 주민들도 점차 요셉 수사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몇몇 환자들은 요셉 수사의 자애로운 봉사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눈을 떴다.
그러던 중 한 의사가 경성 제국대학 병원에서 수술을 관찰하고 보조하도록 해주었다. 경성 제국대학 병원의 지원으로 병원과 지속적으로 전문지식을 교환한 요셉 수사는 1928년 의료행위를 허락하는 일본 제국의 허가증을 받았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경계를 넘어서까지 많은 환자들을 끌어들였다. 1929년 수도원은 환자들을 위한 작은 진료소를 건축하였고 1935년에는 병동도 지었다. 멀리서도 온 환자를 포함해 일 년에 약 18,000명의 환자들이 요셉 수사를 찾아 왔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대세를 줌으로써 하늘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진료소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했는데,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무료로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자선활동은 급작스럽게 종결되어야만 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면서 공산주의가 북한에서 득세하였다. 1949년 4월 28일 요셉 수사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간호사 구타 혐의)로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 1950년 유엔군의 진격으로 북한군이 철수를 시작하면서 평양 감옥에서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