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트(힐라리우스 수사) 호이스는 1888년 6월 27일, 뮌헨 프라이징 교구의 운터라우(쉴레도르프 본당)에서 아버지 안드레아스 호이스와 어머니 마리아 보오스 슬하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운터파이쎈부르그에서 마차수리 기술(제차도제)을 배웠다. 운터파이쎈부르그의 본당신부는 그가 수도원에 입회할 때 다음과 같은 추천서를 써 주었다. “규정에 따라 축일과 의무축일에 자주 성체를 영했으며, 기쁜 마음으로 정비공장에서 일을 했고 필요할 때에는 농사일도 하였다.”
베네딕트 호이스는 힐라리우스(Hilarius)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하였다. 힐라리우스 수사는 1910년 8월 15일 첫서원을 하고, 1911년 1월 7일에 한국으로 파견되어 기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북한과 연길 지역에 많은 선교기지를 지었으며, 1913년 11월 1일 종신서원을 발하였다. 1949년 5월 10일 힐라리우스 수사는 평양 감옥에 수감된 다음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1950년 12월 12일 만포로 피난했을 때 영양실조와 동상으로 사망하였다.
강제 수용소의 수녀 의사 디오메데스 메퍼트의 증언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는 감옥에서부터 지속적인 설사로 인해 매우 약해졌으며, 다리가 부었기 때문에 수용소에서는 처음부터 대부분 앉아서 쉬운 일만 했다. 그는 약용 식물에 정통해 있었으며, 특히 한국의 식물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자유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러한 세밀한 작업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거칠고 억센 큰 손으로 온갖 종류의 아름답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 내었다.
우리의 첫 번째 감실과 미사 때 쓰는 나무 촛대는 그의 경건함뿐 아니라 예술성까지 증명해주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담뱃통과 “귀향 여행”을 위한 산책용 지팡이 등을 만들었다.
만포로의 피난은 그의 건강은 좁은 참호에서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추위로 인해 위험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공간의 협소함으로 인해 그에게는 더욱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1950년 12월 12일 새벽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에게는 진정한 구원을 의미했다.
그의 시신을 매장을 하기 위해 한국인 포로들이 운반해 갔고 다음날 우리에게 그의 무덤을 확인할 기회가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