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준 가브리엘 신부는 1912년 4월 27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구종진(具鐘震, 프란치스코)과 이정자(李貞子, 마리아)의 삼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이었다.
구대준 신부는 1922년 백동 성 베네딕도 수도원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7년 원산 교구를 맡게 된 수도원과 함께 덕원으로 이주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구대준 신부는 과묵하고 생각이 깊어 철학, 신학 과정에 모두 두각을 나타냈으며 여러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문학에 뛰어났고 덕성이 깊어 형제들과 화목했다. 그는 1940년 3월 25일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주례로 이재철 베드로 신부와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다.
구대준 신부는 서품 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덕원 신학교의 사감 신부로 임명되어, 신학생들에게 자율과 책임을 다하도록 지도했다. 1942년에는 흥남 제2대 본당 신부로 부임했는데 당시 흥남에 수용되어 있던 연합군 포로(영국군)들을 찾아가 성사를 집전하였다. 또한 일제의 사설학원 폐쇄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해성(海星) 학원을 계속하였고 사제관에 대건 의원을 개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 사업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에는 회령 본당의 박위명 비트마르(Witmarus Farrenkopf) 신부가 소련군에 피살되고 계림 본당의 민덕기 프리돌리드(Fridolidus Zimmermann) 신부가 사망하자 두 본당의 교우들을 돌보기 위해 자원하여 부임해 갔다.
구대준 신부의 체포 및 순교 상황은 다음과 같다. 그는 1949년 5월 10일에 시작하는 원산 수녀원 한국 수녀들의 연피정 지도를 하러 갔다가, 그날 밤 수녀원에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어 그 다음날 평양 인민교화소에 이송 수감되었다. 그는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와 함께 격리된 작은 감방에 있었다. 1949년 8월 5일경 그는 무척 쇠약한 상태에 있었던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에게 병자성사를 거행했다.
이후의 행방은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피살 혹은 옥사한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