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는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소속 성직수사였다. 1915년 3월 8일, 서울 대목구의 유명한 교우촌 신암리(현재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암리)에서 아버지 이공명(李公明, 바오로)과 어머니 홍 베로니카 슬하의 3남 4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왜관 수도원의 이근재 부르노 수사 (1925년 8월6일 – 2006년 7월18일)가 이춘근 신부의 동생이다.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는 고향에서 보통학교 4년 과정을 마치고, 예수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그리고 1939년 6월 24일 명동 성당에서 서울 대목구장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교구 사제로서 그는 황해도 사리원 본당 보좌로 1년간 사목한 후, 1940년 7월에는 경기도 장호원(現 감곡) 본당 보좌로 1년 정도 사목하였다.
이춘근 신부는 영성 생활에 매진하기 위하여, 서품 2년 후인 1941년에 주교의 추천을 받아 덕원 수도원에 입회를 청했고, 입회가 허락되어 수련을 시작하였다. 법정 수련(수도명은 라우렌시오 Laurentius)을 마친 후, 1942년 7월 26일에 첫서원을 하고 1945년 8월 15일에 종신 서원을 했다. 종신서원을 한 후 이춘근 신부는 덕원 신학교 사감 신부 겸 교수로 일하였다.
당시에는 평양 교구의 사제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므로, 1948년 10월부터 그는 방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지도 신부로 소임을 받았다.
이춘근 신부는 1950년 5월 14일 서포 수녀원이 해산되고 수녀원 건물 일체가 몰수된 후 서포 본당 소속 순안 공소로 거처를 옮겨 계속해서 신자들을 돌보았다. 6월 24일 밤에 평양 교구 내 모든 신부들이 체포될 때, 그도 함께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되고 행방불명되었다. 1950년 10월 5일 북한군이 북으로 후퇴할 때 평양에서 피살되었다고 전해진다.
명 디다고 수사가 1950년 11월 27일경 임 곤라도 수사와 평양에서 만나 3박 4일간 같이 지냈다. 그런데 당시 임 곤라도 수사는 평양에 거주하면서 감옥에 드나드는 의사들을 통해 신부들과 쪽지로 서신 교환을 하였고, 감옥 안에 있던 신부들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였다고 명 디다고 수사는 증언하였다. 임 곤라도 수사는 1950년 10월 5일에 신부들이 처형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이때 이 라우렌시오 신부도 함께 피살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이 부분은 황 다미아노 신부도 동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