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에우세비우스 수사) 로마이어는 1897년 2월 12일 메링(슈바벤)에서 부친 막스 로마이어와 모친 크레스첸츠 쉐플러 사이에 태어났다. 막시밀리안은 1914년 5월 수도원에 입회하였으나 1916년 군대에 징집되어 1918년까지 프랑스에서 전쟁에 참전했다.
1919년 3월 21일 에우세비우스(Eusebius)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한 그는 1920년 4월 5일 첫 서원을 하였고 1923년 4월 5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에우세비우스 수사는 1924년 3월 30일 필리핀 디날루피한의 성 베니토에 잠시 파견되었다가 1924년 9월 3일에 한국으로 파견되었는데, 한국에서 덕원과 연길 수도원 건축 그리고 평양 주교좌성당 건축에서 목수 일을 지휘하였다. 그는 1949년 5월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옥사덕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9월 1일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강제 수용소의 수녀 의사 디오메데스 메퍼트의 증언
에우세비우스 로마이어 수사는 거인 같은 체구의 목수였고, 수용소에서의 굶주림으로 약해지기 전에는 얼마나 무거운 나무 밑둥을 옮길 수 있는지 종종 자랑하곤 했다. 수용소 생활 첫 해에 그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해충과 불결함으로 인한 화농성 피부농종을 심하게 앓았다. 만포 시절에 그는 심하게 동상에 걸려서 거의 모든 발가락의 피부가 벗겨지고 두 개 발가락에서는 관절 마디가 드러났다. 만포에서 돌아온 이후에 그는 혹심한 더위와 가장 어려운 잡초 뽑는 기간에 농사일을 하게 되었으며, 이 일이 그를 매우 지치게 했다.
그는 자주 현기증과 등의 통증을 호소했으나 자기 병의 증세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었다. 그는 가장 적게 설사를 앓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8월 중순 그는 콜레라와 비슷하게 진행된 급성 장 카타르에 걸리게 되었다. 적당한 식이요법과 강장제가 있었다면 그를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이미 아주 수척해진 육체는 급성적인 발병을 더 이상 감당해내지 못했다. 나 자신도 그 시기에는 들에서 일을 해야 했는데, 내가 9월 1일 11시경에 갑자기 수용소로 불려왔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채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는 집에서 약간 떨어진 화장실로 가는 도중에 쓰러졌으며, 그의 동료들이 그를 중환자용 방으로 데려다놓았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를 좋아했다. 그의 평온하고 어떤 일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태도는 수용소 생활의 시달림 속에서 종종 우리를 유쾌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