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한국교회 사제 양성 위해 28년간 헌신한 ‘참스승’
출생 : 1885년 12월 7일, 라우프하임의 잉게르킹겐
세례명 : 요셉
한국명 : 노병조(盧炳朝)
첫서원 : 1907년 10월 20일
사제수품: 1911년 5월 3일
한국파견: 1911년 10월 30일
소임: 백동수도원 덕원수도원 학장, 원산대목구 부감목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1년 11월 9일, 옥사덕 수용소
안셀름 로머 신부는 1921년 백동신학교 개교부터 1949년 덕원신학교 폐교 때까지 28년간 신학교 학장으로서 한국교회 사제양성에 헌신해온 수도자이다. 그는 무엇이든 물어보면 항상 답을 얻을 수 있어 신학생들에게 ‘만물박사’로 통했고, 누구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기분이 어떤지까지 훤히 알고 있을 만큼 자상한 영적 아버지였다.
그는 늘 신학생들과 같은 공간에 기거하며 함께 살았다. 식사 때도 학생들 정면의 높은 자리에 앉지 않고 학생들과 함께 앉아 수저를 사용해 학생들이 먹는 것을 똑같이 먹었다. 휴식도 함께하고 청소와 노동도 함께한 겸손한 교육자였다.
그는 1885년 12월 7일 독일 로텐부르크 슈투트가르트교구 라우프하임 인근 잉게르킹겐에서 아버지 울리히 로머와 어머니 루이스 콥프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요셉.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김나지움과 선교신학교에서 7년을 공부한 후 입회해 ‘안셀름’이란 수도명을 받고 1907년 10월 20일 첫서원을 했다. 이후 딜링겐에서 철학을,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11년 1월 1일 종신서원을 하고 같은 해 5월 3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10월 30일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돼 12월 12일 서울에 도착했다.
한국 도착 후 백동수도원 수련장과 부원장 원산대목구 부감목 직책을 맡은 그는 1922년 3월 새내기 독일 선교사들의 한국 적응에 도움을 주고자 3권짜리 한국어 문법책과 한글 사전을 펴내기도 했다. 또 1921년 11월 3일 11~15세 소년 15명으로 백동신학교가 개교하자 학장직을 맡아 교리와 성경, 그레고리오 성가를 가르쳤다.
이렇게 소박하게 시작한 신학교는 1927년 덕원으로 옮겨간 후 1940년대에는 서울과 대구관구 신학생들도 받아들여 1950~60년대 한국교회에서 중추 역할을 한 주교와 사제들을 배출했다.
그는 신학생들의 신앙 성장과 학문 증진뿐 아니라 문화 충격 극복을 위해서도 세심히 배려했다. “어린 소년이 신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과 함께 살던 낮은 지붕의 초가를 떠나 이 거대한 건물에서 살게 되면 우선 의자에 앉아 있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그에게 이것은 우리 선교사들이 한국인 집에서 몇 시간 동안 맨바닥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기숙사 규칙을 지켜야 할 뿐 아니라 글자 모양도 완전히 다르고 생소한 개념을 내포한 라틴어도 배워야 한다”(1931년 9월 덕원연대기 중에서).
그는 신학교 주변을 청소하거나 운동장을 만들 때도 가장 먼저 삽과 쓰레받기를 들고 나섰다. 처음부터 한국인 소년들의 경건함과 순박함에 매료된 그는 “아이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그들의 눈에서 빛나는 천진난만한 정결함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여러 가지 단점과 결함을 기꺼이 그냥 보아 넘긴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1921년 서울에서 15명으로 시작한 신학교가 1927년 11월에는 65명으로 늘어나 덕원에 새 신학교를 지었을 때 그는 “오틸리아 연합회 신학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자랑했다. 또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서의 지원이 막혀 신학교 재정이 바닥이 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38년 9월 23일 화재로 신학교 건물이 전소됐어도 그는 신학교 문을 닫지 않고 사제양성에 더욱 힘썼다. “신학생들에게는 몸에 걸친 옷 외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지만, 학업을 그만둔 학생은 없었고 학교도 학생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내다보신다”(안셀름 로머 신부가 크리소스토무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그의 이러한 헌신으로 1943년 덕원신학교 신학생 수는 112명에 달했고, 1943년부터 45년까지 40명의 사제를 배출했다.
28년간 사제양성을 위해 한 길을 걸어오는 동안 그의 몸은 스스로 “내 몸이 성한 곳이 없다”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됐다. 하지만 그는 늘 신학생들을 먼저 생각했고 우선으로 대했다.
북한 공산정권의 탄압으로 1948년 9월 신학교 마지막 학년이 시작했을 때 그는 신학생 60명에게 “우리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며 희망을 잃지 말 것을 독려했다.
안셀름 로머 신부는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에서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돼 평양으로 압송된 후 옥사덕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 1950년 겨울 만포까지의 ‘죽음의 행진’으로 그는 처참하게 망가졌다. 심장이 멎다시피 했고 심한 동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계속해서 수종과 설사를 앓던 그는 1951년 11월 9일 새벽 1시쯤 옥사덕수용소에서 순교했다.
강제 수용소의 수녀 의사 디오메데스 메퍼트의 증언
안셀름 로머 신부는 옥사덕 강제수용소에서 옥수수를 벗기거나 산에서 섶나무를 하거나 부엌일을 돕는 등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때를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들에서도 힘이 닿는 데까지 때때로 함께 일했다. 만포 시기는 그의 건강을 매우 나쁘게 했으며 심장도 매우 약해졌다. 심한 동상도 그를 괴롭혔다. 수용소로 돌아온 다음 그는 다시 약간 소생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나오는 따뜻한 말을 해주곤 했다. 그는 신학교에서 일하기 위해 기꺼이 다시 덕원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는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고 종종 웃으면서 질문을 했다. 1951년 11월 9일 밤 1시경에 그는 평온하게 사망했다. 안셀름 신부는 수용소에서는 없어선 안 될 우리 모두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없다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야말로 덕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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