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아르눌프 신부) 슐라이허는 1906년 로텐부르그-슈투트가르트 교구 플라움로크에서 아버지 칼 슐라이허와 어머니 테레사 깁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셉은 로텐부르그에서 인문계 공부를 마치고 5학년 때 지역 시험에 통과한 후 에힝엔 기숙학교(Konvikt Ehingen)로 옮겨 그곳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요셉은 1925년 5월 10일 아르눌프(아르눌푸스 Arnulfus)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고 1926년 5월 15일 첫서원을, 1929년 8월 2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이후 상트 오틸리엔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로마의 성 안셀모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1930년 7월 13일 딜링엔 신학교의 경당에서 칼 레트 보좌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1932년 4월 10일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된 아르눌프 신부는 덕원 신학교에서 교의신학과 성서주석학 교수, 수련장 그리고 부원장 소임을 하였다.
강제 수용소의 수녀 의사 디오메데스 메퍼트의 증언
덕원 신학교에서 일했던 아르눌프 슐라이허 신부는 영감 있는 강의와 강습회, 피정을 지도했고 그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돕고자 했다. 그는 명백한 정신노동자였으며 실제적인 생활노동에는 재능이 거의 없었다. 덕원 수도원의 부원장으로서 그는 평양 감옥을 떠날 때 사우어 주교에 의해 수용소 공동체의 영적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직선적인 심성으로 인해 그에게는 우리 수도원이 당해야 했던 엄청난 부정에 대한 내적인 반감을 숨기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것이 당국의 미움을 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감시인들의 계속적인 비판과 악의에 찬 계략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굶주림과 과로보다 그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1951년과 1952년 사이의 겨울까지만 해도 그는 숯 굽는 일이나 나무 베는 사람들과 함께 일했으나, 파종기가 시작되면서 병세가 악화되어 힘든 육체노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신장과 심장이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았고 화농성 기관지염이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으며, 몸의 종창이 심각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1952년 6월 28일 밤에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아침 9시경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공산주의에 의한 마지막 순교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