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백작 아들, 모든 것 하느님께 바친 열정적 사제로
출생 : 1884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쉬름도르프
세례명 : 베네딕토
첫서원 : 1912년 7월 28일
사제수품: 1914년 8월 13일
종신서원: 1915년 8월 27일
한국파견: 1921년 1월 16일
소임: 원산대목구 내평ㆍ고산본당 주임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11월 6일, 만포수용소
누가 백작 아들의 그런 최후를 예상했겠습니까? 그보다 먼저 간 여섯 분 중 누구도 그렇게 참혹하게 죽지는 않았습니다.”
“수도생활 내내 가난을 사랑하셨던 카누트 신부님은 죽을 때도 온전히 가난하게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 시신은 대충 자루에 싸여 한국인 피랍자들이 들고 갔습니다.”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의 임종을 지켜본 제르트루다 링크ㆍ디오메데스 메페르트ㆍ아르사시아 아이그너 수녀들의 증언이다.
베네딕도(카누트 신부의 세례명) 다베르나스는 1884년 3월 11일 그라쯔-세카우 교구의 쉬름도르프(오스트리아 쉬다이어마크)에서 엉팡 다베르나스의 백작인 하인리히와 그 부인 안나 플라 슬하에서 태어났다.
베네딕도 다베르나스는 내적으로 수도생활을 준비했던 펠트키르크의 군생활을 마치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몇 주간의 청원기를 거쳐 카누트(카누투스 Canutus)라는 수도명으로 수련기를 시작하였다. 그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성인 왕을 주보성인으로 모셨는데, 그의 친형도 이미 같은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주보성인으로 레오폴드 후작을 선택하였다.
카누트는 1912년 7월 28일 유기서원을 발하였고 1914년 8월 13일에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그의 서품식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앞당겨졌다. 1915년 8월 27일에 종신서원을 발하고 1921년 1월 16일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카누트 신부는 북한 공산 정권의 폭압으로 선교 사업이 끝날 때까지 내평 선교기지의 책임자였다. 처음에는 평양 인민교화소, 그리고 나중에는 옥사덕 수용소가 그 생애의 마지막 정착지였다. 그는 1950년 11월 6일 선종했다
※강제 수용소의 수녀 의사 디오메데스 메퍼트의 증언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심장병과 신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도 수용소에 처음 올 때 졸도로 인해 캠퍼 주사로 원기를 회복한 다음 소를 타고 올라왔다. 그는 차츰 회복했고, 할 수 있는 한 농사일과 부엌일을 도왔다. 1950년에 그는 담배 수확과 담배 가공 일을 했다. 피난하는 날까지는 그는 온힘을 다해 우리가 겨울용 저장물로 말리기 위해 집 뒤에 걸어두었던 호박의 껍질을 벗기고 잘랐다.
쇠약하고 병이 든 그에게는 피난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산을 내려올 때 그는 벌써 쓰러졌으며, 캠퍼 주사를 맞고 오래 쉰 다음에야 비로소 계곡으로 부축해 갈 수 있었다. 거기에는 강 옆으로 철로와 국도가 뻗어 있었다. 몇몇 환자와 약한 사람들 – 카누트 신부도 거기에 속한다 – 을 트럭에 태워 북쪽으로 옮길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피난민과 중국 군대의 혼란 속에 밖에서 20시간가량을 기다린다는 것과 또 이동 자체가 그에게는 하나의 완전한 순교였다.
그는 만포 감옥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는 도피에서 추위와 기아, 사람들의 조롱에 내던졌다. 길가에서 죽고 싶지 않으면 계속해서 걸어야 했다. 이러한 고난은 카누트 신부의 체력을 매우 떨어뜨렸다. 그는 병자 도유성사를 받고 나서 조용히 단발마의 고통도 없이 사망했다. 우리는 그를 품위 있게 안치할 그 어떤 방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음날까지 우리는 그가 짧은 잿빛의 죄수복을 입고 머리엔 통나무를 벤 채 빈 옆방의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봐야만 했다. 우리는 외적인 상황이 그렇게 궁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 퍼져있는 고귀한 평온함과 숭고함에 감동을 받았다. 7일에 한국인 포로들이 와서 시신을 가지고 갔다. 우리는 어디로 운반해 가는지 몰랐다. 나중에 이 포로 중 한 사람이 우리 신부에게 그가 매장되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북한 정권은 우리가 북한을 떠나기 전에 만포에서 사망한 다른 사람들의 유골과 함께 카누트 신부의 유골을 새 무덤으로 이장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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