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권 마티아 신부는 1908년 3월 3일 함경남도 안변에서 출생했다. 1921년 11월 1일 서울 백동 소신학교 개교와 함께 예과 공부를 시작했으며 1938년 4월 2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하지만 최병권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아 본당사목을 하지 못하고 덕원 수도원에 머물며 번역 활동을 했다. 또 독일인 수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덕원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다. 1944년 11월 부터는 평양교구의 서포에 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신부 겸, 서포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어 1947년 10월 까지 활동하다가 덕원으로 돌아왔다.
최병권 마티아 신부의 체포 및 순교 상황은 다음과 같다. 최병권 마티아 신부는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에 있던 모든 독일인 수도자들 그리고 한국인 김종수 베르나르도 신부, 김이식 마르티노 신부,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와 함께(독일인 신부 8명, 독일인 수사 22명, 한국인 신부 4명으로 총 34명)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되었다.
경도범 엘리지오(Eligius Kohler) 신부는 『북한에서의 시련』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는(최병권 마티아 신부) 나와 함께 습기 찬 좁은 간방(8㎡ 면적에 18명이 함께 수감)에 수감되었다. 그는 2년 전 맹장 수술을 했는데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부위에서 고름이 계속 나왔다.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점점 야위어 가며 여러번 실신하였다. 임종기도를 해 주고 전대사를 주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상태도 아닌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끊임없이 죽음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1949년 8월 5일까지 목격한 최병권 마티아 신부에 대한 마지막 증언이다. 이후의 행방은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피살 혹은 옥사한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