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Chisto omnino nihil praeponant. R. B.
– 머리말 72,11
(P. Andreas Amrhein, 1844-1927)
독일 보이론 베네딕도 대수도원의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는(1844-1927) 하느님으로부터 해외 선교의 부르심을 받고, 사부 성 베네딕도의 수도 정신에 자신의 선교 이념을 접목시켜 1884년에 남자 베네딕도 수도회를, 1885년에는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를 설립했다. 남녀 수도회는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시도록’ 기도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창설자 암라인 신부의 선교 이념을 실현하고 있다.
1. 어린 시절(1844-1857),청소년기과 성소 식별(1857-1870); 스위스 군츠빌
아기는 자라면서 영이 튼튼해졌다. (루카 1,8)
선생님, 머무시는 곳이 어디십니까? 와서 보시오! (요한 1,39)
요셉 게오르그 암라인(Josef Georg Amrhein)은 1844년 2월 4일, 스위스 칸톤 루체른(Kanton Lucerne)의 군츠빌(Gunzwil)에서 출생하였다. 병약한 체질과 모친의 과잉 보호속에 많은 시간을 홀로 집에서 보냈지만, 그는 책을 가까이 하며 총명하고 뛰어난 재능을 지닌 소년으로 자라났다. 18세 되던 1862년, 그는 휴양을 위해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가서 회화를 공부했다. 이어서 뮌헨(1864-1865), 파리(1865-1866), 칼스루헤(1866)에 가서 그림과 문학을 공부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그는 사제 성소에 귀기울이게 된다. 1867년, 성령강림주일 미사 중에 사제 성소를 확신하는 체험을 하고, 그는 1870년에 독일의 보이론(Beuron) 대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리고 안드레아스(Andreas)라는 수도명으로 수도 생활을 시작하여 1872년 사제 수품, 1875년 성대 서원을 했다.
2. 베네딕도회 수도자로서의 수도생활(1870-1883) ; 독일 보이론과 마레쭈
“내가 만일 라파엘로나 티치아노 같은 천재성을 지니고 그들처럼 갈채를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한 명의 단순한 사제, 세례와 그리스도교적 교육으로서 비록 한 아기라도 하느님의 모상으로 또 천상 영광의 상속자로 만들 힘을 지닌 사제가 되는 은총과 바꾸겠다. 불멸의 영혼이 하느님을 닮게 하고 하느님의 마음에 들도록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 예술이며 가장 심원한 과학이다.”
–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
봉쇄 베네딕도 회원이었지만 선교에의 갈망을 지닌 암라인 신부의 열망은 많은 갈등 끝에 마침내 1883년 8월, 보이론 대수도원을 떠나 포교 성성에 순명해도 된다는 동의를 얻었다.
3. 남자 수도원 설립(1883-1885) ; 라이헨바흐
“우리는 너무나 은혜를 모르며 사랑이 지독히도 부족하다.
우리가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비틀대도록 그냥 내버려둔다.”
–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 –
1883년 12월, 암라인신부는 라이헨바흐(Reichenbach)에 있는 옛 베네딕도회 수도원건물을 사들였다.
수도 생활의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는 그 빈집인 무너진 옛 수도원 터는 남자 수도원의 수련소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 수도회의 첫 시작이다. 1884년 6월 29일, 교황님의 인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 날이 쌍트 오틸리엔 수족의 공적인 창립 기념일로 간주되고 있다. 다음 해인 1885년 3월, 라이헨바흐 ‘해외 포교 신학원’에 벌써 해외 포교 지원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4.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창립(1885)
“수녀들은 놀라울 정도로 그 요구들이 단순하며, 그들의 장상은 수도적 기풍을 유지하는데 엄격합니다……
수녀들은 그들이 받은 성소, 기도, 일, 노래 등을 빼어나게 잘 수행하려는 열의로 활활 타고 있습니다.
–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 –
1885년 9월 24일 선교 성소를 지닌 4명의 여성이 라이헨바흐에 입회하였다. 이 첫 지원자들이 입회한 날을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창립 기념일로 지낸다. 그러나 당시 어떤 수도 단체 설립도 허락지 않던 국내 정치 상황 속에서 신분을 감춘 채 ‘노무자와 하녀’로서 ‘문 뒤에 이루어진 수도생활’이었다.
5. 쌍트 오틸리엔으로 이전(1887)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 2코린 5,6 –
1887년 아우구스부르그 교구의 엠밍으로 수도원을 이전 하였다. 이 작은 성, 즉 맹인들의 수호 성녀인 성녀 오틸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던 엠밍은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선교사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후에 쌍트 오틸리엔(St. Ottilien)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6. 동 아프리카 선교와 시련과 위기(1887-1889)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 베네딕도 규칙서 4,21 –
1887년 11월 18일, 쌍트 오틸리엔의 포교 공동체는 한 명의 신부와 아홉 명의 수사, 네 명의 수녀로 구성된 선교단을 동아프리카(현 탄자니아)로 파견했다. 이 소박한 시작을 1889년, 1월 13일 첫 선교지인 동 아프리카 푸구(Pugu)에서는 식민정책에 대항하는 본토 반란군의 습격으로 마르타 반싱(Martha Wansing)수녀와 두 수사가 살해당하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혀갔으며 선교원이 전소되었다.
7. 모원의 발전과 초대 총장 수녀 선출(1889-1895)
“나는 하느님이 베푸신 은총에 따라 슬기로운 건축사로서 기초를 놓았습니다.”
– 1코린 3,10 –
쌍트 오틸리엔에서는 첫 선교사들을 파견한 이후 계속해서 수도적 삶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물질적 궁핍은 여전했으나 그들은 암라인 신부의 지도 아래 베네딕도회다운 전례와 공동생활의 영성을 키워나갔다. 비록 1889년 푸구 폭동으로 인한 첫 선교사들의 순교가 시련과 위기의 시기를 지나게 하였지만, 한편 푸구에서의 선교사들의 순교 소식을 듣고 많은 문의가 왔고 그들 중 많은 이가 지원했던 것이다. 1895년 9월, 비르깃다 코르프 (Birgitta Korff) 수녀를 모원의 장상으로 선출하였다.
8.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의 사임(1896)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 (2코린 5,7) –
1891년부터 온 암라인 신부의 총장직 사임이 1896년 1월 결정되었다. 선교지의 파괴, 수녀 장상의 퇴회, 창설자의 사임 등은 어리고 경험없는 공동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했다. 그러나 쌍트 오틸리엔은 한 인간의 업적이 아닌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기에, 이는 더 단단한 줄기를 뻗어 꽃을 피우기 위한 시련이었던 것이다.
9.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로서의 수도회 정체성 확립(1900)
“하느님께서 모든 일에 있어 영광받으시기를”
– (베네딕도 규칙서 57,9) –
창설자의 사임 후, 베네딕도 연합은 쌍트 오틸리엔 수도 공동체의 청원을 받아들여 보이론 수족의 일데폰스 쇼버 아빠스를 오틸리엔 남녀 공동체의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앞서 보이론 수족의 아빠스들은 마리아 라흐 수도원에서 쌍트 오틸리엔 공동체를 오틸리엔 공동체는 베네딕도 연합의 한 일원으로 결정하였다.
10.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승인(1900) 및 툿찡으로 모원 이전(1904)
“사랑하올 주님께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예컨대 중요한 결의 사항,
또는 은혜 등을 주시려하면 언제나 예수성심 금요일 중에 주십니다.”
– (비르깃다 코르프 초대 총장 수녀) –
‘선교 베네딕도’ 수녀란, 당시로서는 교회법에 의한 신분 규정이 애매한 상태였다. 하지만 1900년 레오 13세의 교령으로 인하여 활동하는 수녀 공동체들이 정식 수도회로 인정됨에 따라, 베네딕도 회원이면서 선교사’라는 정체성이 합법화된 것이다. 이후, 1904년에는 툿찡으로 모원을 이전하였으며, 1924년 교황 권하 수도회가 되었다. 이로써 쌍트 오틸리엔의 남자 수도원과는 법적으로 완전 분리되어 독립된 수녀회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1. 창설자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의 선종(1927)
“Benedicat vos Deus. semper, semper, semper……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축복하시기를……”
–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의 마지막 강복) –
암라인 신부는 1923년 쌍트 오틸리엔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27년 12월 29일에 포교 베네딕도회의 창설자로서의 지극한 사랑을 다하여 남녀 공동체를 강복하고 83세를 일기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12. ‘하느님의 충실성에 의지하여’ 새로운 성장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 (1요한 2,17) –
툿찡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는 베네딕도회적 수도승 생활을 바탕으로 암라인 신부의 선교 이념에 따라 한국을 비롯한 온 세상으로 뻗어나가, ‘기도하고 일하며’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현재 로마에 총원을 두고 19개국에서 1,400여 명의 수녀들이 활동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창설이 하느님의 일이었다는 것을 명백히 봅니다. 인간의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고 영감을 주시고 이끌어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 하느님을 두고 코린토 1시 1장 28절이 말하지요. ‘그분은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 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 헤아릴 수 없이 많던 큰 고통들, 그리고 내 훗날의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진심으로 영예와 영광을 드리기 원했던 예수 그분의 이름을 위해 일한 것 외에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명예는 도중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세상과 나이를 섬기느라고요. 이제 주님의 이름이 선포되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보며 나는 위로에 가득 차서 기뻐합니다. 그리고는 나를 위해 마련하신 주님의 날을 기다리면서 위안을 받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었는지 압니다. (1 티모 1,12)’”
1910년 4월 2일에 쓴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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